죽음의 영역 안에 발 들여놓은 사람, 한 번 발을 들였다가 빠져나간 사람, 빠져나오지 못한 채 허우적대는 사람…. 모두 가슴에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알아보고 어루만질 수 있는 방법은 공감이고, 그것은 사람을 향해 진심으로 다가갈 때 나온다. 영화 ‘종이꽃’은 사람을 통해 삶과 마음속에 빛을 품게 되는 이들의 이야기다.
‘종이꽃'(감독 고훈)은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진 아들과 살아가는 장의사 성길(안성기)이 옆집으로 이사 온 모녀를 만나 잊고 있던 삶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성길은 매번 하나하나 손으로 종이꽃을 접어 죽은 이의 마지막을 기린다. 그런 성길에게는 사고로 걷지 못하게 된 아들 지혁(김혜성)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죽겠다는 지혁을 위해 간병인을 들여야 한다. 형편이 녹록지 않은 성길은 대규모 상조회사와 계약하고 새롭게 일을 시작하려 한다.
그런 성길 앞에 어느 날 어쩐지 정신 없는 모녀 은숙(유진)과 노을(장재희)이 찾아든다. 모녀는 성길과 지혁의 지친 삶에 끼어들고, 그들의 밝고 거리낌 없는 모습은 성길과 지혁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사진=㈜로드픽쳐스, ㈜스튜디오보난자 제공)영화는 상처받은 이들, 사회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 표면적으로는 아름답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다. 자신만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매개로 한 곳에 모여든다.
성길은 죽음 앞에 선 이들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 장의사지만, 그의 직업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과거 군대에 있을 때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후 의사가 아닌 장의사의 길을 택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밝게 살아가는 은숙은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득하다. 남편의 폭력 탓에 죽음의 문턱까지 걸어갔으나, 삶이 생동하는 소리를 들은 은숙은 살아남기를 택한다. 가정폭력 끝에 남편이 죽고, 은숙은 살인자라는 이름을 안고 딸과 살아간다.
지혁은 의대생이었다. 여행 작가를 꿈꿨던 지혁은 아버지 권유로 원치 않는 길을 가야 했고,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뒤 떠난 마지막 여행에서 사고를 당한다. 그 후 매일같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
성길, 은숙, 지혁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내보이고 인정한다. 앞으로 나아가길 거부했던 이들은 한 걸음씩 조심스레 내디디며 나아간다. 같은 아픔을 지닌 이들이기에, 결핍을 안고 사는 이들이기에 그 공백을 서로의 마음으로 채워 나간다. 그 마음의 중심에 있는 건 ‘사람’이고 ‘희망’이다.
(사진=㈜로드픽쳐스, ㈜스튜디오보난자 제공)성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건 은숙과 노을뿐만이 아니다.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을 돌봤던 국숫집 사장 장 선생의 죽음 역시 성길에게로 향하며 그를 움직인다.
시청은 미스 월드 대회 진행을 위해 장 선생의 장례를 광장에서 치르려는 노숙자들을 가로막는다. 성길 역시 계약을 맺은 장례업체 ‘해피엔딩’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은숙이 만든 마음의 틈이 벌어지며 장 선생의 장례를 돕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비 오는 날처럼 마냥 궂은날이 계속되던 성길의 마음속에도 햇빛 한 줄기가 비추게 된다.
성길에게 ‘시키는 대로’라는 말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남다르다. 과거 광주로 향해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러야 했을 때도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했을 뿐이다. 그 부채감은 몇십 년이 지나도 성길을 괴롭혔다. 장 선생 장례는 성길이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다.
영화는 안정적이고, 익숙한 듯 나아간다. ‘죽음’을 매개로, 죽음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각자 삶의 이유와 희망을 발견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상처와 그들이 어떻게 미래를 향하는지 보여준다.이를 통해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질문을 던진다.
‘종이꽃’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가르는 것 사이에 우리 고정관념과 편견이 끼어드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진짜 바라봐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늘 그렇듯 안성기의 연기는 섬세하면서도 안정적으로 극의 중심을 관통하며 관객들을 스크린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담담한 듯 속으로 슬픔과 아픔을 삭여내는 연기, 그리고 어느새 한 발짝 내딛기 위해 움직이는 성길의 모습을 차분히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