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허버’ ‘오조오억’ ‘힘죠’….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조어들이다. 그런데 이들 신조어가 때아닌 남혐(남성 혐오) 논쟁에 휘말렸다. 용례를 보면 특정 성별을 혐오하는 직접적인 의미는 없지만 그 유래가 ‘남성 혐오’에 있다는 주장이 거세다.
카카오는 지난달 ‘허버허버’ 표현이 들어간 이모티콘을 판매 중단했다. 앞서 한 이모티콘을 두고 ‘허버허버’가 ‘남혐 단어’라는 지적이 불거지자 취한 조치다. 그런가 하면 유튜버 고기남자는 자신의 영상에 ‘허버허버’라는 자막을 사용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문을 게시했다.
‘오조오억개’ 역시 남혐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동원참치 광고를 패러디한 NC다이노스 홍보 영상은 ‘오조오억개’ 표현이 나온다는 이유로 집중 포화를 받았다. 가수 겸 방송인 하하 역시 유튜브 영상에 해당 단어를 썼다가 논란이 돼 영상을 삭제했다. ‘매력이 오조오억개’라는 글과 함께 SNS 게시물을 올린 그룹 있지(ITZY) 멤버를 향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방송인 공서영은 SNS 게시물에 ‘힘죠’를 사용했다가 남혐 논란이 불거져 직접 사과했다. 공서영은 ‘힘내다’와 ‘힘주다’의 사전적 의미를 전하면서 “제가 이렇게 알고 골라 쓴 표현이 이미 다른 의미로 많은 분들께 받아들여지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이 표현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데 쓰이고 있고 그걸 본 많은 분들이 불편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공서영의 말처럼 해당 단어들은 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등 남초 커뮤니티에서 널리 쓰이는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와 같이 특정 성별에 대한 비하를 직접 드러내는 용어들은 아니다. ‘허버허버’는 급하게 무엇인가를 하는 모습을, ‘오조오억개’는 무수히 많다를 재미있게 표현한 단어다. ‘힘죠’ 역시 ‘힘내라’는 격려 의미로 자주 쓰여 왔다.
그렇다면 일부 남성 누리꾼들은 왜 이들 신조어를 ‘남혐’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여성 커뮤니티에서 남성을 비하할 목적으로 이들 신조어가 만들어졌다는 ‘남혐 유래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를 명확히 ‘남혐 용어’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일베에서 시작된 여혐(여성 혐오) 신조어들과 달리 해당 단어가 특정 성향 커뮤니티에서 파생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허버허버’는 이미 2019년부터 쓰인 신조어로 당시 중앙일보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에서는 해당 단어가 ‘급히’라는 뜻의 영단어 ‘Hubba-hubba’에서 유래됐다고 전했다. ‘오조오억개’ 역시 한 팬이 아이돌 멤버를 찬양하는 댓글에서 발전했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힘죠’는 성소수자 불법 촬영 영상을 희화화한 데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지만, 그렇다면 ‘성소수자 혐오’이지 ‘남성 혐오’로 보기는 어렵다. 이 신조어가 널리 확산되면서 ‘힘내라’는 보편적 의미를 재밌게 표현했을 뿐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지닌다.
이러한 논쟁은 깊어진 젠더 갈등 탓에 신조어에 대한 검열과 프레임 싸움으로 확산되는 양상을 띤다는 진단이 나온다. 한편에서는 이 같은 흐름을 우려하기도 한다. 정확히 유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해당 신조어들을 ‘남혐’ 단어로 규정하는 행위가 젠더 갈등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어에 직접적 혐오 의미가 없는데다, 그런 의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잉 검열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확산되고 있다. ‘보이루’ ‘아몰랑’ ‘오또케’ ‘ㅗㅜㅑ’ 등 여성 비하 의미나 성희롱 용례가 있는 ‘여혐’ 신조어들이 더 문제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현재 젠더 갈등은 재미있게 쓰여왔던 신조어에까지 파장이 미칠 정도로 양극단의 혐오에 달했다”며 “분노는 용서를 빌면 가라앉지만 혐오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한번 생기면 조정이나 타협이 힘들고 끝까지 간다. 과거 보수와 진보 진영처럼 이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의제들이 젠더에 따라 나뉘어 대립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해마다 성차별 용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조어까지 갈 것 없이 한국 사회 속에는 뿌리 깊은 여성 차별적 일상 용어들이 많다. 이들 용어들은 여성에게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하거나, 여성을 낮추는 의미를 담는다. 작게는 ‘맘스스테이션’ ‘저출산’ ‘유모차’부터 크게는 기본값을 남성에 두고 앞에 ‘여’를 붙이는 모든 단어들, 남편 쪽 형제·자매들만 높이는 호칭 등도 포함된다.
이 같은 일상 용어조차 완전히 개선되지 못한 상황은 한국 사회 여성 인권이 이전보다 나아졌을 뿐, 평등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지표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축적된 여성 혐오를 거부하는 이들에 맞서, ‘남성 혐오’를 경계하고 주창하는 새로운 목소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현서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유독 청년세대에서 부각된 젠더 갈등은 ‘공정성’ 문제와 연결돼 있다”며 “예전에 남성들은 사회 전반에서 일자리 기득권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여성들과 경쟁해야 한다. 당연하게 누렸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이 교수는 “지금 사회는 이 모두를 개인 탓으로 돌리고 능력 지상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며 “능력주의 폐해가 결국 공정성 문제를 낳았고, 젠더 갈등이 촉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청년실업, 고용불안이 주는 패배감과 분노를 계속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저학력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해 표출하고 있다”며 “오히려 우리는 노동시장에 안착하지 못하는 원인을 사회 구조적 문제로 돌려서 약자들과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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