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이재용은 전 대통령의 뇌물 요구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뇌물을 제공했고, 그 과정에서 ‘승계작업을 돕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해 달라는 부정한 청탁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뇌물·횡령 혐의에 대해 파기환송심도 ‘승계작업’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제 1심을 시작하는 ‘불법승계 의혹 재판’의 대응 전략이 바뀔지 주목된다.
사건의 순서대로라면 불법승계 의혹 사건이 국정농단 뇌물·횡령 사건보다 먼저 수사와 재판을 받았어야 한다. 검찰은 이 부회장이 그룹 승계라는 개인적 목적을 위해 계열사 합병과 회계조작을 하고(불법승계 의혹) 외부적 도움을 얻으려 회삿돈으로 정권에 뇌물을 줬다(국정농단)는 혐의로 각 사건을 기소했다.
국정농단 뇌물·횡령 재판과 불법승계 의혹 재판은 별개이기 때문에, 한 사건의 유죄가 다른 사건의 유죄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삿돈으로 정권에 뇌물을 준 동기가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 때문이며, 이와 관련한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는 점까지 이미 인정된 만큼 불법승계 의혹 재판은 시작부터 이 부회장 측에 불리해진 상황이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임정엽 권성수 김선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부회장의 자본시장법 위반(부정거래·시세조종) 등 혐의에 대한 1회 공판준비기일에서는 변호인들이 일제히 ‘승계목적’을 부인했다.
당시 이 부회장 측 변호사는 “통상적인 경영활동인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의 회계처리가 범죄라는 검찰의 시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공소사실도 전혀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 부회장과 함께 기소된 다른 삼성 임원 측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은 정상적인 경영활동에 따른 것으로 자본시장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피고인들의 임무에 위배된 행위를 한 적도 없다”고 반박했다.
앞서 201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승계작업이란 이 부회장이 최소한의 개인자금을 사용해 삼성그룹 핵심계열사(삼성전자 등)들에 대한 의결권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가리킨다”고 정의까지 내린 상황이었다.
18일 오후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을 마친 이인재 변호사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장 등이 모두 승계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현안’이라는 점도 판결문에 적시됐다. 그럼에도 새로 시작된 공판에서 승계작업의 존재와 관련한 이 부회장 측의 변론전략이 기존과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14일 ‘뇌물수수자’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데다, 이 부회장에 대해서도 지난 18일 파기환송심에서 대법원의 판결 취지가 그대로 인정되며 승계작업의 존재가 두 차례 더 최종 확인을 받았다.
이르면 다음달 재개될 2회 공판준비기일에도 기존과 달라지지 않은 주장을 이어갈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이미 여러 차례 법원에서 인정된 내용과 반대되는 주장을 펼칠 경우 추후 유죄 판결을 받게 될 때 양형에서 더욱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 측이 법원의 인정 취지를 일부 받아들이는 한편 이번 국정농단 재판에서 채택되지 않은 준법감시위원회를 더욱 활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수감 중인 이 부회장은 21일 변호인을 통해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을 계속 지원해달라는 첫 옥중 메시지를 보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승계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단순 기업활동의 일환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반박하는 전략이 현재로선 유력해 보인다”며 “한편으로는 준법감시위 등 유리한 양형요인들을 최대한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