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혐오표현을 규제하기 위한 사회적 논의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학계, IT기업 등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인권위는 22일 IT기업 카카오, 학자들과 ‘온라인 혐오표현 규제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고 “혐오표현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높아지고 있지만, 혐오표현이 무엇이며, 왜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혐오표현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다. 인권위 ‘혐오표현리포트2019’에 따르면, 혐오표현은 ‘성별·장애·종교·나이·출신 지역·인종·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어떤 개인, 집단에게 △모욕·비하·멸시·위협 또는 △차별 폭력의 선전과 선동을 함으로써 차별을 정당화, 조장, 강화하는 효과를 갖는 표현이다. 대상 집단을 향한 물리적 공격이 아닌, 언어 등을 사용한 언동 등이 특징이다.
학자들은 “혐오는 차별의 문제로 귀결된다”며 “표적집단을 끊임없이 구분짓고 배격하고 차별을 조장하기 때문에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표현 그 자체의 해악에 더해, 표적집단을 향한 폭력적 행위(혐오범죄)를 일으킬 위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부정하고 개인적 인권(인격권, 자유권,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고도 짚었다.
2020 혐오·차별 대응 국제 콘퍼런스(그래픽=연합뉴스)한국언론진흥재단 박아란 선임연구위원은 “2010년 이후 외국인 근로자, 다문화 가정, 특정 지역을 타겟으로 삼는 온라인 혐오 게시물이 급증했다”며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여혐, 남혐 논쟁이 심각해졌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중국인과 특정 종교에 대한 혐오표현이 확산했다”고 진단했다.
사법부도 혐오표현 규제의 필요성을 사실상 인정해왔다. 앞서 헌법재판소(헌재)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것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차별적 언사나 행동, 혐오적 표현’도 헌법 제21조 표현의 자유의 보호 영역에는 해당하되, 단 헌법 제37조 제2항에 따라 제한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헌재는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상대방의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특정 집단의 가치를 부정한다”며 “조례가 금지한 차별, 혐오표현은 민주주의를 위해 허용되는 의사표현이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규제 필요성이 인정되므로 혐오표현 금지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혐오표현 규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 선임연구위원은 규제가 어려운 이유로 △개념 정의의 어려움 △역사·사회적 맥락이 반영돼야 하는 어려움 △처벌 대상 규정의 어려움 △법규 적용의 어려움 △혐오미디어 등 디지털 테크놀로지 발달로 인한 어려움 등을 꼽았다.
혐오표현 대상을 소수자(수적 소수자 또는 지배적 위치가 아닌 사람)로 한정할지, 역사적으로 차별받아온 소수자 집단이나 다수도 포함되는 특정 집단 등으로 할지는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처벌 대상을 어떻게 규정할지도 마찬가지다.
국회 전경(사진=사진공동취재단)국회에서 관련 입법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20대 국회에서 혐오표현 규제 법안 8개가 발의됐지만, 모두 회기 만료 등의 이유로 자동 폐기됐다. 이번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지난달 7일 발의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온라인상의 혐오·차별표현 등 모욕에 대한 죄를 신설했다. ‘공공연하게 상대방을 혐오·차별’하거나 ‘혐오·차별을 선동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내용의 정보’ 등이 포함됐다. 혐오표현으로 비롯된 자살 방조에 대한 처벌조항도 마련하도록 했다.
혐오표현은 그동안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으로 처벌돼 왔다. 형사정책연구원이 2016~2017년 온라인 모욕죄 사건을 분석한 결과, 혐오표현은 119건으로 전체의 31.6%를 차지했다. 버스를 함께 탄 인도인에게 “아랍인은 더럽다, 냄새난다”고 발언한 이는 벌금 100만원에 처했다. “여자들은 뚱뚱하면 안 된다. 못생긴 X”고 말하거나, 인터넷 게임 채팅에서 “김치X, 낙태충”이라고 말한 경우도 벌금형에 처했다.
판례는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글이 올라왔을 때, 웹사이트 운영자가 삭제 요청을 받은 때로부터 2시간 이내에 삭제할 의무가 있다고 인정했다.
많은 국가가 혐오표현을 형사처벌하고 있다. 서울대 인권센터 이주영 전문위원은 “인종주의적 혐오표현을 시작으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성, 장애 등을 이유로 한 혐오표현으로 범위를 확장했다”고 밝혔다.
독일은 형법 제130조에 따라 민족·인종·종교·국적·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특정 집단에 대해 증오 혐오를 선동하는 행위, 경멸, 악의적 중상 혹은 명예훼손으로 인간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한다. 프랑스, 영국, 캐나다 등은 혐오표현 관련 상영물 배포, 전시, 광고, 전파 행위 등을 처벌한다.
미국은 혐오표현도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받지만, 미 연방 양형위원회 가이드라인 매뉴얼에 따라 ‘혐오범죄’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 특히 피해자의 개인적 특성(인종, 피부색, 국적, 성별, 성적 지향, 장애 등)이 범행 동기가 됐을 때 3배까지 가중처벌할 수 있다.
(그래픽=연합뉴스)온라인 혐오도 제재하고 있다.
독일은 2018년 네트워크시행법을 입법해, 형법에 규정된 21가지 불법행위(증오 선동, 위헌조직 상징물 사용, 전쟁범죄 야기 시도 등)를 이용자가 신고하면 SNS 운영자가 신속히 삭제할 의무를 부과했다. 위반시 최대 60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 프랑스에서도 지난 5월 ‘온라인 혐오 콘텐츠 대응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언론자유법에서 불법으로 규정한 혐오표현을 이용자가 신고하면 24시간 내에 삭제하거나 접근제한조치를 의무적으로 하도록 했다. 테러 관련 콘텐츠와 아동 성착취 관련 콘텐츠는 신고 1시간 내로 조치해야 한다. 위반시 최대 17억 3천만원 벌금을 부과한다.
한양대 컴퓨테이셔널 사회과학 연구센터 최진호 연구원과 충남대 이승선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지난 8월 25일부터 일주일 동안 일반시민 102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시민인식조사 결과, 성별·연령대·교육 수준에 따라 온라인 혐오표현을 인지하는 수준에 차이가 나타났다.
정치 성향, 출신 지역, 성별, 장애 대상의 온라인 혐오표현에 대한 인지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인종, 민족, 국적, 종교, 성적 지향, 특정 연령층 대상 혐오표현 인지는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선동형 표현보다는 모욕형 표현을 상대적으로 더 혐오표현에 가깝다고 인식했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온라인 혐오표현에 대한 민감도가 높았으며, 연령대가 낮을수록,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민감도가 높았다.
남성이 여성보다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약 3.7배 많이 생산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혐오표현 생산 주체는 연령대별로 고르게 나타났다. 1주일에 1회 이상 혐오표현을 생산하는 비율은 약 35%로 조사됐다. 혐오표현을 생산하는 이유로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서'(27.5%) △’상대방이 먼저 내가 속한 집단을 비난하는 내용을 올려서'(21.1%)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14.7%)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 대상자 가운데 남성은 515명(50.4%), 여성 507명(49.6%)였다. 평균 연령은 44.58세로 전국 17개 권역에 걸쳐 조사했다.
연구진은 “개념적 판단과 실제 표현에 대한 판단이 불일치했다”며 “혐오표현 대상과 나와의 거리감에 따른 판단의 차이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또 “온라인 혐오표현을 접한 뒤 심리적 위축보다 행동적 위축이 상대적으로 더 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인권위는 올 연말에 ‘온라인 혐오표현 세미나’ 최종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