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19주년 추모예배

한국 교회가 지금처럼 부흥할 수 있었던 건, 복음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들어와 헌신했던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885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복음전도와 교육활동 등을 펼치다 숨진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19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는 추모예배가 열렸습니다. 최경배 기잡니다.

[기자]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19주년을 맞아 그의 선교적 삶을 돌아보는 추모예배가 열렸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27살이던 아펜젤러 선교사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낯선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갑신정변과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혼란한 시대 상황에서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복음전도와 교육,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서울 정동에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했고, 성경 번역과 신문 발행에도 나서는 등 근대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 1986년에 조직된 독립협회를 지지하며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도 기여했습니다.

17년 동안 활발한 사역을 펼친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사고로 순직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순직 119주년 추모예배에는 그가 설립한 배재학당 출신 목회자들이 모여 고인의 뜻을 되새겼습니다.

[녹취]
(김원경 목사 / 배재동문목회자회 회장)
“이기적으로 사는 죄의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을 거꾸로 뒤집어서, 이타적인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만드는 그런 신앙이다 이거죠. 그런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겁니다. 이 살아있는 신앙을 아펜젤러 목사님이 갖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젊음과 열정을 바쳐 영혼 구원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삶은 감리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발전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인터뷰]
(김낙환 목사 /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그분이 가졌던 신앙적인 열정 또 보여주셨던 개척정신, 그리고 조선에 대한 뜨거운 사랑,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뜨거운 사랑, 그런 것들을 우리 후손들이 배우고 따라야 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선교초기 우리나라에 들어와 17년 동안 열정적으로 전개되던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역은 119년 전 불의의 사고로 중단됐습니다.

하지만, 아펜젤러 선교사의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와 교육기관을 통해 영혼과 삶이 변화되는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