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열린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의의 최대 성과는 트럼프 집권 시절 삐걱대던 한미동맹을 다시 정상 궤도 위에 올려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양국은 특히 북핵 문제의 최우선 순위를 확인하고 ‘완전한 대북공조’에 공감했다. 이로써 북한의 도발을 예방하고 비핵화 협상을 재가동할 의미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美 대북정책에 韓 지분 참여…한반도 정세 관리 최소한의 근거 마련
양국 장관들은 18일 공동성명에서 “한반도 관련 모든 문제들을 긴밀히 조율하고 있고, 한미 간 완전히 조율된 대북전략 하에 다뤄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한국의 의사가 충분히 존중돼야 함을 뜻한다.
이를 위해 양국은 현재진행 중인 미국의 대북정책 검토와 관련한 고위급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고, 이와 별개로 외교당국 국장급 정례 협의체도 출범하기로 했다.
바이든 정부의 새 대북정책 수립에 한국의 지분 참여가 가능해진 셈이다. 물론 선언적 성격이 강한 ‘긴밀한 대북 조율’을 미국 측이 얼마나 보장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한국의 입장을 반영함으로써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만들어졌다.
연합뉴스◇바이든 정부 행보에 北 발끈, 도발 암시…블링컨은 인권 비난 지속
바이든 정부는 집권 초부터 기존의 핵·미사일 외에 인권 문제까지 집중 거론함으로써 북한을 필요 이상 자극해왔다.
실제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 17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북한 독재정권이 인민들을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학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8일 기자회견에서도 “북한 주민들은 압제적인 정권 아래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다”며 강경 기조를 이어갔다.
이런 탓인지 북한은 오랜 침묵을 깨고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의 입을 빌어 비난전을 재개했다.
최선희 담화는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지속할 경우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도발 가능성까지 암시해 긴장감을 높였다.
이와 관련해 미국 우주·미사일사령관 등은 북한이 머지않아 개량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할 것이라 경고하며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 외교·국방 장관 회의(2+2회의)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공동성명은 ‘北인권’ 빠지고 완곡어법…한미 긴밀한 조율 이미 시작?
이런 가운데 한미가 공동성명으로나마 절제된 대북 기조를 확인하고 한미 간 긴밀한 조율을 강조한 것은 최소한 상황의 추가 악화를 막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공동성명에는 블링컨 장관이 재차 강조한 북한 인권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고 ‘CVID’ 같은 비핵화 용어도 없었다.
물론 블링컨 장관은 공동성명과 상관없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북한 인권 비판을 이어감으로써 한국 측과 강조점을 달리했다.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불씨가 되살아날 여지는 있지만, 하마터면 시작부터 어긋날 뻔한 북미관계를 다잡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미 국무·국방장관이 이번에 미국의 생각을 솔직히 얘기한 것 같다. 그러나 공동성명에선 한국 입장과 조율하면서 상당히 중립적 표현으로 간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중국에 대한 노골적 비판도 수위 조정…한국 입장 고려한 듯
한국 입장에서 난감한 현안인 중국 견제전략이 공동성명에선 완곡하게 정리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블링컨 장관은 전날 “중국이 홍콩 경제를 허물고, 대만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티벳 인권을 탄압하고,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강압적 수단을 쓰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공동성명은 “한미동맹이 공유하는 가치는 규범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불안정하게 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고 수위가 낮아졌다.
미일 2+2 회의 공동성명이 중국을 직접 겨냥한 것과 달리 ‘역내 안보환경에 대한 점증하는 도전’이란 표현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동맹 중시’를 표방한 바이든 행정부가 이미 상당 부분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왼쪽부터),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정의용 외교부 장관, 서욱 국방부 장관이 한·미 외교·국방 장관 회의를 마친 뒤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신남방-인·태전략 연계는 묘수”…전향적 대북접근 도출 실패는 아쉬움
이번 공동성명에서 특히 주목할 곳은 “한국의 신남방 정책과의 연계 협력을 통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지역을 만들기 위해 함께 협력해나간다는 결의를 재강조했다”는 대목이다.
신남방 정책을 통한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역량 강화가 인·태 전략의 중국 견제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점에 착안해 창의적 해법을 모색한 것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신남방 정책은 미국의 대중국 압박을 잘 피해가는 묘수”라면서 “우리로선 선택적으로 협력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명분과 실리를 둘 다 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난제인 한일갈등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원만하게 정리됐다. 미국은 이번 한일 순방에서 강력한 중재에 나섬으로써 사실상 한국을 압박할 것이란 우려가 있었다.
한미 양국은 그러나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과 ‘상호호혜적이고 미래지향적 협력’을 언급하는 수준에서 봉합했다.
결국 미국이 아시아 핵심 동맹국들을 상대로 대중국 전략을 짜기 위한 최종 탐색전에서 한국은 적절한 조율을 통해 비교적 선방한 셈이다.
다만 우리 정부가 제기해온 종전선언이나 싱가포르 선언 계승 등의 전향적 대북 접근에 대한 공감대까지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양 교수는 “북한은 미국의 대북정책을 좀 더 지켜볼 것이나 시간만 흐른다고 판단될 경우 김여정 부부장이 예고한 조치 실행으로 압박할 것”이라며 대북·대미 양측의 조속한 대응을 주문했다.